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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철학

지식 전수라는 존재론적 목적을 지닌 학교는 그 생명을 다했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성적, 등급 그리고 선발이라는 평가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꺼진 등불을 부여잡고 어두운 동굴 속을 계속 걸어갈 뿐이다.

우리에게는 어두운 동굴 속을 함께 걸어나 갈 작지만 소중한 햇불 하나가 지금 필요하다. 현명한 교육자들은 미래의 교육과 이미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여 고교 학점제, 마을학교, 인턴쉽 등을 핵심으로 교육철학과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넘어지지만 현명한 교육자들은 끈기를 지니고 있다. 아이가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고민이 끈기와 함께 하고 있다. 나의 아이들과 너의 아이들은 곧 우리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끈기가 적고 영리하지 못한 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육자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이다. 처절하고 비참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가운데서 희망을 바라본다. 그러나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미래에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까? 바로 1년 전의 교육목표와 교육방법이 후폐하는 작금에 미래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프로그램이 중심이 아닌 교육의 본질에 집중하는 학교가 필요하다. 교육의 본질 구현은 배움의 중심인 학생 이전에 학교의 영혼을 지킬 교사와 그 학교가 뿌리 내리고 있는 마을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근대 이전 학교는 늘 그러해 왔다. 여기서 구구절절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을에 삶의 맥락을 둔 선생과 마을의 모든 인프라가 합심하여 한 아이를 길러내던 시절에는 늘 그래 왔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 퇴니스의 게마인 샤프트Gemeinschaft 가 존재하는가? 개인의 이익과 자본주의, 물질문명으로 점철되어진 게젤 샤프트Gesellschaft가 창궐하는 이곳에 전통과 애정, 돌봄이 존재하는 진정한 마을이 존재하느냐는 말이다. 이 질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반응은 한숨 뿐이다.

이로서 학교의 장엄한 시대적 책무는 아주 무겁다.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을 다시 빚어내는 것, 그리고 그곳에 사람과 생명이 다시 움트게 하는 것이 이제는 당위적 사명이 되어 학교에 요청된다. 이러한 요청이 이 작은 학교에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하고 반문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데이터화하고 물량화하고 권력과 힘으로 인식한다면, 우리의 대답은 예스이다. 하지만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학교와 마을 그리고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감지한다면, 작고 나약한 것은 오히려 더 크고 다이나믹할 수 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담론이나 논리적인 이성적 판단,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다. 작고 여리지만 섬세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 논리적이진 않지만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감성, 합리적이지 않고 바보 같지만 손해를 감수하며 서로를 보듬는 작은 배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곧 마을이고 학교이고 나아가 사회,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으니까 할 수 있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렇다면 김해의 작은 학교에 우리는 어떤 생각의 씨앗을 심을 것인가?

 

우리의 선조들은 어떠한 교육을 했을지 상상해 보자. 아마도 어느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이 들기 전, 그날의 수렵과 채집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들은, 어머니와 아들은, 어머니와 딸은, 아버지와 딸은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이러 저러 했으니 수확이 좋았어~ 그러니 내일도 이렇게 해보자~ 라던지 아니면 오늘은 이랬는데 안좋았어~ 내일은 다르게 해보자~ 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 것이다. 물론 생존이 달려 있긴 했겠지만 모닥불에 비친 부모와 아이들의 눈빛은 따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눈빛을 바라보며 나눈 대화는 최고의 동기유발, 자발성, 자유, 사랑, 끈기, 지식 전수 등을 이뤄냈을 것이다. 오늘날 그토록 교육현장에서 갈망하는 좋은 것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비록 상상이지만 가족은 공동체를 근거로 존재하며 또한 수렵이나 채집 등 등의 기술과 방법은 개인의 존재 그리고 고유성을 이루는 근간이다.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그리고 고유하고 존엄한 개인들이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모범이 된다.

각 종 히어로 물이 영화의 대세가 되어 가는 시점과 개인과 작은 공동체의 내러티브가 가득 담긴 영화가 점차 사라져가는 시점은 일치한다. 우주를 날아다니고 초능력을 보유하고 한명의 개인이 엄청난 일을 해내는 전혀 현실과 상관이 없는 히어로 영화는 개인의 서사와 관련된 애틋한 영화를 잠식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의 삶과는 괴리된 이야기들이 우리의 공간과 시간에 들어왔고 들어 올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공동체, 그리고 각 개인의 실존이 희미해지고 때론 끊어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와 실존 그리고 공동체와 실존적 개인 사이의 서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우리 사회는 빛나는 근대화를 겪었다. 그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했던 슈퍼잡(super job)을 한 달음에 쳐냈다.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상하고도 모호한 말로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축하했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우리는 한강에서 수영도 하고 물고기도 잡았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강은 기적의 장소이지 더 이상 우리의 이야기가 꽃피는 곳은 아니었다. 고도 산업화 이후 정체기에 접어들 무렵 많은 젊은이들이 실직에 허덕이거나 취직을 했더라도 쉼 없는 일로 과로에 시달렸다. 힐링이 한국어가 되어버릴 정도로 만연해진 피로, 사회적 단어가 되어버린 공황장애, 우울증은 이제 한국에 만연한 지병이 되어버렸다. 서로 모른척하며 누구나 그 정도의 병은 안고 살아가는 것인냥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근대화의 부작용은 몇 몇 의식있는 작은 자들의 각성에서부터 회복의 빛을 보았다. 이들은 성공 때문에 가족을 버릴 수 없고, 돈 때문에 나의 존재 가치를 포기할 수 없고 도시의 거대하고 화려함 속에서 사라져 가는 나만의 이야기를 놓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처럼 작은 삶, 느린 삶, 곁에 있는 것에 만족하는 삶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정답은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서사에서 분리된 자아로서의 삶은 아닐 것이다. 우리 학교는 이렇게 작은 움직임 속에서 치료와 회복을 꿈꾼다.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함께의 가치와 개인의 실존 그리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서사가 우리의 미래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김해금곡고등학교에서는 함께의 가치 그리고 개인의 실존, 서사(Tale)를 회복 하려고 한다. 과거 어른들은 당연히 받아왔고 누려왔지만 오늘날 아이들은 전혀 맛보지 못한 함께, 실존, 서사(Tale)라는 고대어를 다시 오늘날에 맞춰 재탄생 시키려는 것이다.

함께란 무엇인가? 이것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매우 철학적인 개념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개인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너와 내가 만날 때 만들어진 것인지, 또 누가 우리이고 누가 우리가 아닌지, 어떤 조건이 우리를 만드는 것인지, ‘우리는 누가 결정하는 것인지 등 고민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 이를 위해 소통(Dialogue), 끈기(Grit), 민주시민력(Democracy)은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다. 이를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 구체적인 각론은 교육과정에서 다루기로 하고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현상을 기반으로 한 방법을 취하는 것이 가장 전략적이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실존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모호한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함께를 근거로 해석할 때 조금 쉬워진다. 함께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실존이다. 생각하는 힘은 마치 근육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튼튼해지고 발달한다. 근육과 같은 사고력은 문제해결력(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배려적 사고력으로 이루어진다. 사고력 특히 고차적 사고력은 실존의 힘을 키워준다. 이러한 실존의 힘은 이 시대에 누구나 따라가는 유행을 자신만의 색깔로 거부하거나 맞아들이게 하고 누구나의 행복이 아닌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을 따라서 살아내는 자세를 갖추게 한다. 이 역량을 기르기 위해 문제를 기반으로 한 학습 방법이 전략적일 수 있다.

서사란 무엇인가? 개인의 실존과 공동체의 함께가 만날 때 비로소 성립이 가능하다. 거대 담론 속에서 사라진 나만의 이야기는 공동체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특히 Tale 은 공동체 속에서 구전되어 온 이야기가 글로 재탄생 된 것이다. 구전되어 오면서 그리고 글로 쓰여지면서 전달자와 작가의 이야기가 가미된다. 전달자와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난제(aporia)에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며 도전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진정한 인간이다. 하지만 이 난제들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과업을 설정하고 해결하는 과정 중에 깨달아지고 역량이 키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실존’, ‘서사는 온전한 자유 속에서 자란 자발성이 보장되어야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온전한 자유적 자발성은 끝없는 신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적 사랑은 온전한 자유적 자발성이 만의 것이 아닌 우리나아가 모두가 평등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는 걸 알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넘어서야 한다. 나의 실존에 대해서 고민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서사는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다. 재미있고 의미있는 이야기는 항상 실패의 끝에서 시작된다. 불편을 겪어 내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고, 고통이 다가올 때 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며, 실패를 해봐야 드디어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출발선에 서게 된다. 그리고 불편과 고통, 실패를 겪은 사람만이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김해금곡고 선생들은 아이들을 불편과 고통 그리고 실패의 한 가운데로 계속 밀어 넣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곳에 아이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