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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을 보내는 마음(2023.4.24)
작성자 허승 등록일 2023.05.09

사실 지난 주에 학생 한 명이 전학을 갔습니다. 마음이 복잡합니다. 처음도 아니고 해마다 있는 일이지만, 매번 마음 추스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졸업한 1기 학생이 3년의 학교생활을 회고하면서 쓴 글을 읽어보며 그 학생과 학교에 있는 학생들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학교문집에도 실려있습니다.) 보호자 분들도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학생 이름은 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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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금곡 1기!

1기 000

학교 앞에 있는 논이 까까머리가 됐다. 학교에서는 논으로 계절을 알 수 있었다. 봄에는 벼의 새싹이 논에 돋아나 있었고, 여름에는 익지 않은 푸르른 벼가 파릇파릇하게 논밭을 채운다. 가을에는 노란 논밭 위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볼 수 있었고, 추수를 해 논이 까까머리가 될 때 즈음이면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학교에 있는 테라스에서는 논의 변화가 한 눈에 보였다.
내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 논의 색깔은 푸르른 초록색이었다. 코로나로 6월달에서야 학교에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학교 앞에 있는 논을 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아?' 하나였다. 학교의 첫 인상도 논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개교하기 이전에도 학교가 지어지는 중에 한 번 와 봤었는데 사실 나는 그때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 학교에 와봤던 건 겨울이었다. 그때 학교 뒷산의 모습은 무언가 을씨년스러웠는데, 그때는 밍숭맹숭하던 논조차도 좋지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 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까마귀 똥을 맞았다. 까마귀들은 내게 자신의 배설물을 투척하고는 까악거리며 날아갔다. 까마귀의 그 축축한 느낌과 까악거리는 울음소리는 어쩌면 내게 경고를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 것은.
나는 학교에 입학 후 내가 맞은 까마귀 똥에 대해 여러 번 생각했다. 왜냐하면 학교에 와서 순탄하게 흘러간 일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소에 일주일씩이나 갇혀있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히 빡센 일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매주 새로운 위기들이 닥치곤 했다. 바니걸 전 남친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이상한 애는 언제나 내 곁을 맴돌고 있었고, 학교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에서 내 기는 쏙쏙 빨렸다. 그래서 나는 거의 매주 집에 가서 엄마에게 진지하게 학교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한 것은 2학기가 되기 직전, 세탁기, 고작 세탁기 문제로 다툼이 생겼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일도 아니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던 것 같다. 인생에서 처음 있는 큰 부딪힘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2학년 때까지도 꽤 오래 기억에 남아있었다. 아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었을 것이다. 여튼 그 뒤로도 자퇴 생각은 계속되었다. 학교를 다니며 제일 즐거웠었던 1학년 2학기를 제외하면 한 학기에 한 번씩은 매번 자퇴 결심을 했었다. 나는 나의 1학년이 끝나는 방학식 날, 학교를 다니며 더 이상의 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안일한 생각이었다. 1학년 때보다는 2학년 때가 더 힘들었고, 2학년 때보다는 3학년 때가 더 힘들었다. 학교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다툼이 없기는 힘들었다. 가족들도 매일 매일을 함께한다면 싸운다. 특히 나와 다른 타인과 24시간을 함께한다는 건 특히 그랬다. 시험도, 수업도, 진로에 대한 고민도 전부 많았지만 소수인원의 학교에서 가장 힘든 건 인간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붙어있는 만큼 유대감은 포인트처럼 쌓였는데, 특히 나는 적은 인원의 사람에게 애정을 몰빵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친구와 다툼이 있을 때마다 데미지는 어마어마했다.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과의 다툼과 내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과의 다툼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2학년은 내내 다툼의 연속이었다.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이 시작되는 새해의 첫날, 나는 결심했다. 올해만큼은 꼭 인간관계의 고민을 끝내겠다고. 그러나 3학년 역시 고민의 연속이었다. 원래 있던 인간관계라는 고민 위에 진로와 논문이라는 고민이 몆 덩이 더 올라갔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래서 매번 진로가 바뀌곤 했는데 이제 대학의 학과를 선택해야 하는 나에게 여러 갈래의 걱정과 고민이 생겼다. 학교에서 한 가지에만 몰두한 적이 없었는데 대학의 학과는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었다. 난관이었다. 그리고 논문, 사실 나는 논문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은 상태로 논문을 마주했다. 그러나 내 생각보다 논문은 크게 내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논문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논문을 마무리하는 달에는 글을 너무 많이 써서 키보드가 꼴보기 싫을 정도였다. 한 번은 논문을 미루고 침대에 누워서 폰을 보고있는데, 00선생님의 목소리가 메아리쳐서 들렸다.

"00~? 논문 써야쥐~?"

생각보다 논문의 양은 계속 늘어갔다. 그만큼 늘어가는 다크서클의 크기를 승주 선생님은 보셨을까. 그러나 사실 그건 1학기 때의 과거의 내가 미룬거라 할 말이 없어 글만 묵묵하게 썼다. 쓰다 보니 언젠간 끝은 났다. 논문을 끝낸 다음 날의 쾌감은 인생에서 몇 번 느끼지 못할 만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12월에 논문을 끝내고 졸업이 다가왔다.
글에는 힘들었던 부분만 와다다 적어놨지만 학교에 온 것을 후회하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물론 3학년 1학기까지만 해도 까마귀의 경고에 대해 자주 곱씹었지만, 졸업을 앞둔 지금 후회를 하진 않는 것이다. 분명 학교는 엄청 힘들었지만 힘들었던 만큼 매우 즐거웠다. 금무고에서의 경험은 어디에서나 해보기 힘든 경험임이 분명했다. 매년하는 해양훈련도, 로드스쿨도, 너무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임이 분명했다. 특히 마지막 로드스쿨에서 나는 많은 감정이 오고 갔던 것 같다. 물론 내가 해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도 있었지만, 다 함께해서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다 함께 일주의 시작이었던 해변으로 들어갈 때는 무언가 벅찬 감정이 들었다.
학교에 와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는데 그것은 내 내면의 힘과 1기들이었다. 학교에 와서 나는 성장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경험을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 가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각자 다른 사람들과 붙어있을 수 있을까. 나는 1기들을 보며 약간 가족 같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나는 문득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어느 누군가의 뒷통수를 보며 한 대 갈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혈육 외에 누군가의 뒷통수를 진심으로 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든 건 진심으로 걔가 미워서이긴 했지만 사실 미워한다는 감정은 엄청난 애정이 있어야만 들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함께 많이 웃는 만큼 자주 다퉜지만 그마저도 애정이 있어야만 다툰다는 걸 학교에 와서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나의 치부를 이렇게까지 드러내며 함께하는 순간이 가족 외에 얼마나 될까. 가족도 아마 이렇게까지는 모를 것이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면서도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나와 이렇게까지 가까워질지 몰랐던 사람들인데, 걔네를 생각하면 왠지 애틋해진다. 물론 서로 엄청 디스하지만 기쁜 일에는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될까.
글을 쓰며 정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쳤다. 그중 학교를 되돌아보며 가장 처음으로 스쳐지나갔던 건 00 선생님이셨다. 1학년 1학기 말, 자퇴하고 싶다며 우는 나와 함께 울어주셨던 00 선생님이 떠올랐다. 00 선생님은 나의 첫 길잡이 선생님이셨다. 1학년부터 2학년까지는 줄곧 00 선생님이 나의 길잡이 교사셨다. 그만큼 나와 학교에서 제일 대화를 많이 나눈 선생님이 00 선생님이셨는데, 아마 내가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 졸업글을 쓰고 있는 것은 00 선생님의 지분이 약 50% 정도는 되실 터였다. 선생님은 내가 힘들 때마다 내게 힘과 다정함을 보내 주셨는데, 그 힘은 큰 힘이 되어 학교를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게 도와주셨다. 00 선생님을 떠올리면 항상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 자동으로 떠올려진다. 선생님의 속을 많이 썩였기 때문이다. 죄송한 일을 떠올리자면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다정함을 보내주신 00 선생님께 너무나 감사하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선생님처럼 다정한 어른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나는 졸업하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평생 안경을 끼신 00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려질 것 같았다. 부드러운 용기를 주신 00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평일의 교무실 풍경은 조용하고 따뜻하다. 나는 우리 학교의 교무실 풍경을 좋아한다. 내가 노크를 하고 들어가면 업무를 보시던 선생님들께서는 한 마디씩 TMI를 던지시며 반겨주신다. 나는 이런 우리 교무실이 너무 좋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따끔씩 심심할 때마다 교무실에 종종 찾아가곤 했다. 그럼 00 선생님께서 반갑게 놀아주신다. 그러나 나는 가끔 교무실에 가기가 꺼려질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과제가 많을 때다. 과제나 일이 많을 때 교무실에 가면 동시에 이름이 불리며 선생님께 가야 할 순서가 정해지곤 했다. 그때는 내가 잠시 교무실에 가는 게 꺼려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때만 빼면 나는 교무실에 가는 게 좋다. 절대 교무실에 있는 간식 때문은 아니다. 여튼 나는 우리 교무실을 정말 좋아하는데, 학생이 교무실을 좋아하기는 우리 학교가 아니면 흔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교무실의 분위기는 선생님들이 우리 선생님들이셔서 가능한 게 아닐까-! 교무실에서 업무를 보시는 교장 선생님, 츤데레 00 선생님과 00 선생님, 머찐 00 선생님, 나만의 아이돌 00 선생님, 유쾌하신 00 선생님, 포근하신 00 선생님, 귀여우신 00 선생님, 다정하신 00 선생님. 나는 이 교무실의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항상 푸근한 보건실의 00 선생님도, 내가 다녀왔다고 인사하면 항상 반갑게 잘 다녀왔냐고 물어봐 주시는 사감 선생님도 너무너무 보고 싶을 것이다. 요즘은 졸업을 조금만 더 미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난 내가 아직 어떤 삶을 살아갈지 잘 모르겠다. 살아가고 싶은 삶의 그림은 그려지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라면 한 치 앞도 모르겠다. 내 진로는 어찌됐든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내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시간> 세바시에 나오는 건데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일을 하든 세바시에 나올 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건 써놓으면 미래의 내가 이불킥할 것 같긴 하지만 원래 꿈을 크게 가져야 떨어지는 조각도 큰 법이랬다.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닌,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고 넘어저도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이제는 진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마무리하는 글을 쓰며 졸업의 한 발 앞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졸업이 어느덧 2주도 남지 않았지만 아직 졸업을 한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었는데, 글을 쓰며 뭔가 받아들여진 것 같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의 일을 회상하고 떠올리며 마지막이 서서히 받아들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들과 떨어지는 건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3년 동안 가족보다 더 많이 봤는데,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우리 중에는 커서 계속 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계속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떻든 우리 모두 각자의 길을 빛나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중에 언젠가 10년 뒤 쯤 다 같이 모인다면 너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었으면. 너네랑 3년 동안 너무 행복했어 얘들아.

3년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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